비가 오면 비관주의자는 땅이 질척거릴 거라 말하고, 낙관주의자는 먼지가 가라앉을 것이라 말합니다. 낙관주의자는 벌을 보고 꿀을 만드는 곤충이라 하고, 비관주의자는 사람을 쏘는 곤충이라 말합니다. 낙관주의자는 살아있는 것이 기쁘다 하고, 비관주의자는 죽어야 하는 것이 슬프다 말합니다.
한 아버지가 공원에서 어린 아들을 데리고 걸음마 연습을 시키고 있었다. 아빠는 환하게 웃으며 아이에게 어서 오라고 손짓을 했고, 아이는 겨우 한 걸음을 떼고는 바로 넘어져버렸다. 아빠가 얼른 아이를 일으켜 세우고는 또다시 앞으로 가서 아이에게 손짓을 보냈다. 아이는 걸음을 떼기가 무섭게 또다시 넘어졌다. 그러나 아빠는 다시 아이를 일으켜 세웠다. 아이는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아빠와 아이의 걸음마 연습은 이렇게 계속되었다. 공원에 어둠이 내리고 아빠가 아들을 안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벤치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이 아이의 아빠에게 말했다.
“당신은 공연한 수고를 한 것 같소. 아이는 오늘 여든 일곱 번이나 넘어졌다오.”
그 말을 들은 아빠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요? 저는 아이가 몇 번 넘어졌는진 모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 아이는 여섯 걸음이나 혼자서 걸은 걸요.”
‘지각된 한계(Perceived Limitation)’ 라는 말이 있습니다.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미리 정해놓고 새로운 일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단정 짓는다는 뜻입니다.
당신은 아이의 걸음을 세고 있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아이가 넘어진 횟수를 세고 있는 사람입니까?